한국전쟁 60주년과 민족 에너지
국제정치외교협회 회장 이안범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인류는 1만4000회 전쟁을 치렀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만 150회의 전쟁이 발발했다.
20세기에서 제일 잔인하고 규모가 컸던 전쟁이 6∙25였다. 소련제 탱크와 전폭기를 앞세운 북한군이 1950년 6월 25일 새벽 남한을 기습 공격한 전쟁은 3년 1개월 53시간 동안 유엔군 33만명, 공산군 180만명, 한국인 300만명을 전사시켰다.
1000만 이산가족과 500만명 난민을 초토화된 광야로 내 몰았던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휴전했지만 지금도 불꽃처럼 계속 타오르고 있다.
6∙25전쟁의 국제정치적 음모는 얄타에서 스탈린에 의해 계획되었다. 그것은 중국과 군사방위조약을 체결한 뒤 미군이 6∙25전쟁에 개입하면 만주 벌판으로 유인해 소련 원자탄을 사용, 소련과 중공군 협공으로 응징시킨다는 주도 면밀하게 계획된 국제전쟁이었다.
휴전 당시 슬픈 운명의 언덕에 서있던 상처투성이 대한민국은 허공을 향해 눈물 삼키며 꺼억꺼억 신음했을 뿐 휴전협정에 서명도 못했던 ‘이상한 전쟁’, ‘이상한 휴전’을 경험했다.
휴전 조인식에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과 중화인민 의용군 사령관 팽덕회, 미 육군대장 겸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 등 3명이 모여 협정을 체결했다.
60년전 한국이 죽임을 당했고 초상집 되어 한국이 처절한 피를 쏟으며 신음 중인 장례식 같은 휴전조인 현장엔 왜 상주인 한국 대통령은 참석도, 서명도 못했는가.
그러한 6∙25 휴전이 과연 올바른 협정이었던가. 6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지만 지금도 그것이 얼마나 이해 못할 협정이었던가를 생각해 보면 통곡을 금할 수 없다.
1994년 6월 크레믈린 궁을 방문한 김영삼에게 보리스 옐친이 선물했던 검은 상자 속에서 스탈린의 남침 승인서, 모택동에게 “북한을 지원하라”는 문제의 지령서 등 300종의 극비문서가 발견되었다. 이들 문서는 6∙25는 한반도를 점령하면 미국과의 냉전대결에서 승리한다는 구 소련의 엉뚱한 세계 제패 야욕 때문이었음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이제 한반도를 초토화시킨 전쟁의 주범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런데도 60년을 휴전 국가로 살아온 한반도는 여전히 190만명의 군대가 상존하는 예비전쟁터이다.
세계 220여 국가 중 유일한 분단국 한반도를 누가 왜 분단시켰는가. 한국과 북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원해서였나? 아니다. 결코 아니다. 분단을 만들었던 당사국들은 이제 그 분단에 책임지고 통일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역사적 책임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고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6월 평양에 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난 뒤 서울에 돌아와 “한반도에서 더 이상 전쟁은 없다”고 호언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러나 그는 답해야 한다. 왜 천안함이 폭파되고 46명의 꽃보다 더 귀한 민족의 ‘아들들’이 죽임을 당했던건 가에 대하여.
나는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이 결과적으로는 치명적인 정치적 실수였다고 생각한다. 그 후유증으로 지금 한반도는 신 냉전 체제로 돌입되었고 전면 전쟁의 가연성에 불을 지펴놓은 형국이 아닌가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은 체제와 이념을 초월한 민족대동단결 촉구를 7∙4 공동성명으로 확정했었다. 당시로는 획기적인 안보의 둑을 쌓았던 것이다. 그런데 김대중 정부가 그 둑을 무너뜨리고 천안함 사건의 단초를 만들어 놓았다고 본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또 제2의 천안함이 폭파될는지 예측할 수 없는 현실이야말로 지금 바다에서, 하늘에서, 한반도 처처에서 잠복중인 6∙25라는 공룡이다. 6∙25 전쟁 60주년이 되었지만 조국은 여전히 위험하다. 그러나 931회의 외침 속에서도 자유와 평화에 대한 염원을 붙잡고 살아 온 민족 역사의 위대함을 나는 믿는다. 그 믿음이 민족통일 로드맵이며 6∙25 발발 60년의 의미를 뛰어넘을 민족적 에너지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