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노래
국제외교협회 회장 정치학박사 이안범
‘45년전, 1960년 4월 19일, 서울은 전쟁터였다. 동족이 동족의 피를 받고 빨리운 서럽고 처절한 전쟁을 닮은 지옥이었다. 폭발된 민중에너지가 역사의 대전환을 향해 무섭게 포효를 뿜어내는 열기로 온 나라가 부글부글 끓었던 혁명의 도가니 속으로 녹아 들었다’
당시 필자는 대학생이었고 혁명의 새벽을 주도했던 항쟁 지휘본부에 예속된 데모 선봉 향도였다. 이승만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며 을지로 입구에서 내무부 자유당을 포위할 데모대를 이끌면서 거대한 독재권력과 역사를 향해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독재정권 타도하자’란 구호를 목이 찢어져라 외치고 또 외쳤다. 난 내 목소리에 쇳소리가 섞인 무서운 파워 에너지가 있다는 사실을 그때 데모현장에서 처음 발견하고 내 목소리에 내가 놀랬었다.
오전 11시경 수 천명의 학생들이 내무부 앞 아스팔트 위에서 연좌하며 구호를 외치는데 어딘가에서 출동된 경찰이 우릴 향해 무차별 발사를 가했고 학생들은 총알밥이 되어 낙엽처럼 그렇게 쓰러졌다. 순식간의 상황이었다. 내 옆에서 물통을 공급하던 여학생이 머리에 총을 맞고 퍽 쓰러졌다. 두개골이 깨지면서 하얀 철사처럼 생긴 골이 쏟아져 피와 섞여 튀면서 아스팔트와 전차 레일위로 흩어졌다. 사람의 머리골이 하얀 철사처럼 생긴 것도 태어나서 처음 봤다. 내 몸 속에 흐르던 뜨거운 피가 싸늘하게 식는다는 느낌과 동시에 용수철처럼 튕겨져 나간 나는 데모군과 경찰을 향해 동시에 “살인경찰 죽여라”를 외치며 경찰 지휘부로 뛰어들었다.
날 에워싼 데모, 학생들과 경찰의 사투가 1시간이 계속되면서 학생과 경찰이 함께 길바닥에 시체처럼 나뒹굴었다. 경찰에게 총을 빼앗은 우리들은 내무부를 공략했고 종로, 남대문 등에서 탱크와 버스를 약탈한 데모 지휘부는 죽은 학생 시체를 탱크 위 그리고 버스 천정에 싣고 광화문 거리를
행진했다. 그들과 합류한 우리 소속 데모대는 어깨동무하고 울면서 울면서 애국가를 합창했고 각지로부터 합류한 남녀 학생 부대들은 경무대로 진군했다. 길거리로 쏟아져 나온 아주머님들이 바가지에 물을 떠와 우릴 먹였다. 어떤 아저씨들은 냄비 속에 가득 찬 밥을 손으로 퍼 주시며 “먹고들 기운내”, “먹어야 힘이 나지”라며 밥 덩어리를 내밀며 눈물을 주룩주룩 훔쳐 내시기도 했다. 이런 마음들이 바로 민중의 단합된 의지이며, 힘 아닌가? 이것이 4.19란 역사이며 이승만 정권의 최후이다.
한국의 시인 김수영은 ‘푸른 하늘’이란 시를 통해 ‘어째서 자유에는 /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 왜 고독한 것인가를 /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 / 라고 노래했고, 제국주의가 절망의 늪에 빠져 전쟁의 폐허로 신음하고 있던 1922년 TS 엘리어트는 ‘황무지’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 시대적 상황은 욕망을 뒤섞으며 /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라고 당시의 현실상황을 아파했다.
4월이 잔인했던 것은 주검 같은 삶을 강요당했던 ‘아픈 현실’에 대한 성찰과 분노 때문이다. 독재권력과 싸워 쟁취해 낸 자유의 냄새, <민주>란 피의 냄새가, 지금 다시 그리운 것은 조국은 그래도 나의 조국임을 죽어서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겠지.
이 컬럼을 쓰기 위해 어제 밤 난 산타모니카의 밤 해변가에서 45년전 그 날을 기억해내느라 허우적거렸다. 어두운 태평양 밤바다를 응시하며, 45년전 혁명전쟁터에서 나와 함께 싸우다 산화한 넋들을 위로하고 명복을 빌었다.
혁명속에서, 그 현장에서 죽지 않고 나는 왜 지금 살아있는가?
45년간 역사와 조국 발전을 위해 뭘 했었는가? 무슨 족적을 남기기 위해 죽지 않고 살아 있는가?라는 스스로를 향한 질문 때문에 깊은 회한에 빠져 고독한 밤을 허옇게 지새웠다. 아! 잔인했던 4월의 기억들이여! 아! 4월의 노래여! 오라! 희망으로! 오라! 빛으로!!